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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과학

한국전쟁 전후 제3세계 민족주의 인식의 변동

by 강이엄마 2022. 12. 20.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군국주의 일본의 패전과 함께 조선은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으나, 그와 동시에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 분할되어 남과 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진주했다. 해방 직후 조선인들에게 미군과 소련군은 해방군으로서 환영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스트 추축국에 대한 민주주의 연합국의 승리로 인식되었으며, 미. 소의 분할점령이 드리울 암영에 대한 위기의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독립된 민주국가로서 조선의 신국가 건설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해방 이후 국내 사회주의 세력은 전국적으로 신속하게 조직화하는 가운데 초기 해방정국을 주도했고, 민족주의 세력 또한 완만하지만 규합하고 있었다. 해방 직후 두 세력의 대립과 갈등이 부재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각기 자신들의 조직적 기반을 확보하는 데 주안을 두고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5년 말 모스크바 3 상회의 결정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특히 남한 우익 세력을 축으로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남한 전 지역으로 확산하는 가운데, 좌우 세력의 대립과 갈등이 전면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이후 모스크바 3 상회의 결정에 따른 일련의 절차가 진행되는 가운데 좌우 세력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후회된 1946년 5월까지 국내의 정치적 격동 속에서 주요 정치 세력과 매체에서 '아시아'의 국제적 동향에 대한 관심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1946년 5월 1차 미소 공동위원회 결렬에 따라 신국가 건설의 낙관적 전망은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분단에 대한 위기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미군정의 좌익 탄압과 좌익 세력의 '신조선' 채택, 그리고 일부 우익 세력의 단독정부 수립 의사가 표명되는 가운데 조선의 정치 세력과 지식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전개되고 있던 세계정세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로 1946년 중반 이후 극동, 아시아 지역의 정세에 대한 분석과 평가, 전망이 남한의 주요 매체들 지면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 해 초부터 국민당과 공산당의 군사적 충돌이 본격화되자 1946년 중반부터 관련 소식이 주목받았고, 그 외 인도와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서 전개되고 있던 식민지 해방. 독립운동은 1947년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이들 지역의 동향에 대한 남한 정치 세력과 지식인층의 인식에 나타난 특성을 살펴보자. 먼저 중국 문제에 대한 남한 지식인층의 관점을 전반적으로 살펴본다면, 초창기에는 논자에 따라 약간의 편차는 존재했지만 대체로 국. 공협 상의 성공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가운데 관망하는 입장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1947년을 지나면서 중일전쟁 이래 국. 공의 군사작전 지구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 나타난 미국과 소련의 작전. 주둔 지구를 겹쳐보면서 '군사작전'의 측면과 '정치협상'의 측면을 구분하여 파악하는 논고가 발표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의 승리와 국민당의 패퇴가 가시화되지 않았던 1947년까지도 대체로 국공내전에 대한 미국의 중재 노력이나 군사. 경제적 원조, 소련의 중국 공산당 지원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부재하다는 점 등이 작용하여 관망하는 태도가 많았다.

그러나 1948년 남북 분단 정부수립이 이루어지고 중국 공산당의 우세가 가시화되기 시작하자, 남한 정부 수립에 적극적이었던 우익 세력은 중국 공산당의 우세를 소련의 후원에 따른 것으로서 소련의 동진 정책, 제국주의적 팽창의 결과라고 주장하고, 이를 동아시아 지역 방공 대책의 긴급성을 설파하는 주된 근거로 활용했다. 이러한 정세 인식은 후술할 1949년 중반 이후 '태평양동맹' 결성의 필연성과 시급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이어졌다.

이처럼 주장하는 일부 우익 세력의 평가와는 달리, 국공내전이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굳어졌던 이유를 '소련의 지원'에 의한 공산당의 군사적 위력에서 찾기보다는 미국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패퇴했던 '국민당의 부패와 무능'에서 찾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와 같은 국공내전에 대한 국내의 반응은 1949년까지 중국 공산당이 '티코' 화할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전망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과 영국 등의 중국 공산당에 대한 정책 또한 '중공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가운데 중립 지대 화하는 방안'이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되었다.

그런데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의 승리가 확연해지고 국민당 정권이 대만에 퇴로를 확보하는 가운데, 1949년 7월 장제스가 필리핀을 방문하여 키리노 대통령과 회담하고, 그가 제창했던 '태평양동맹' 결성에 뜻을 같이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의 적극적인 동의가 표명되자, 장제스는 1949년 8월 한국을 방문했고, 양자는 동맹 결성을 위한 예비회담을 키리노에 제의했다. 이와 같은 '태평양동맹' 결성 시도는 서유럽의 북대서양 조약기구 창설이 전해지자 이를 모델로 하여 시작된 구상이었다 국공내전이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귀결되고 한반도가 분단되었으며,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이 활성화되는 상황, 이에 더해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 내부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활동이 두각을 나타내는 가운데 공산주의의 확산을 경계하고 방어하기 위한 집단적 방위협정이 필요하다는 공감대에 의한 것이었다.

'태평양동맹' 결성이 제창되자 국내 반공 우익 세력들은 적극적으로 이를 환영하며 그 절박한 필요성을 강조했고, '민주주의의 보루이자 최일선'으로 대한민국을 자리매김하고 아시아와 전 세계의 '반공'에서 첨단적 역할과 위상을 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출처:한국 사회과학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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