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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과학

1950년대 후반 후진성 극복 담론의 지형

by 강이엄마 2022. 12. 21.

앞에서 살펴본 바 1950년대 후반 국제정세 인식과 관련하여 한국 지식인층의 제삼 세계 인식의 변동양상을 염두에 두면서, 이하에서는 당시 제삼 세계 국가들의 정치. 사회적 특성에 관한 한국 지식인층의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한국 지식인층이 제삼 세계 국가의 정치. 사회적 성격을 파악하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빈번하게 사용했던 '후진성' 담론에 주목하려 한다. 후진성 개념은 단지 제삼 세계 국가들에 대한 시에서, 관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당대 한국 사회의 사회적 현실을 제삼 세계 국가들과 동시대적. 동질적으로 인식하는 개념적 틀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1954년 헌법 경제조항 개정 논의에서도 표출되었지만, 1950년대 전반 이래 야당이었던 민주국민당-민주당 세력과 동아일보, 사상계, 새벽 등을 주도했던 지식인들은 봉건성 내지 후진성의 극복과 근대사회로의 개혁을 주장하는 계몽적 설명을 지속했다. 이러한 설명의 주된 논지는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인 민주정치의 실현, 경제적으로 관권 개입 배제와 민간경제 육성을 통한 자본주의적 근대화, 사회·문화적으로 근대적 시민문화의 육성에 놓여 있었고, 그 속에서 이데올로기이자 운동으로서 '민족주의'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흥미로운 것은, 대체로 1956년 이선근 문교부 장관 사임 이후부터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그 이전처럼 멸사봉공이 민족정신을 내세우며 국가, 민족, 반공을 결합하여 대내적 통제와 동원을 시도했던 이데올로기적 작업을 적극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파편적인 형태로 표출된 사례를 제외한다면,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제삼 세계 국가들의 정치 현상에서 나타나는 권위주의적. 독재적 통치양식을 근거로 자신들의 권력 확장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를 사실상 동일시하면서 이승만에게 세계적 반공 지도자의 권위를 부여하고,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자신들의 집권 정당성으로 확보하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공식적으로는 정당 대의제도를 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을 내세웠다. 따라서 그들은 이승만의 집권을 유지하는 가운데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선거제도를 통해 의회를 장악하는 것에 몰두했다. 그 결과 제삼 세계의 잦은 쿠데타와 권위주의적 통치양식은 정치적 후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오히려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지식인층에 의해 정권의 권력구조와 통치행태를 비판하는 근거로 자주 활용되었다.

이와 같은 후진성에 대한 태도는 1950년대 후반 이승만 정권에 우호적이지 않았던 일간지와 지식인 잡자는 공통적인 논조였다. 이는 당시 제삼 세계 정치 현상에 관한 시에서 더욱 완연히 드러난다. 1957년 초반 태국 총선거에서의 관권 개입을 비난하는 학생들의 시위로 태국 정부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강경한 대응을 취하자, 이에 대해 후진국들의 '민주적 건설을 지향하는 하나의 진통'을 현시한다고 평하면서, 그 다른 예로서 인도의 네루와 국민의 회피 독주, 인도네시아의 군부란 만연과 그 대응으로서 수카르노의 순정적 민주주의, 과거 중국국민당 정권의 헌정 실패, 이란·파키스탄·터키 등의 정변과 정국 불안, 이집트 '나세르 독재' 등을 언급했다. 오로지 필리핀이 막사 이사이 집권 이후 '민주적인 공명선거와 청렴 행정의 길'을 간 것만을 예외적인 상황으로 평가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아시아의 진통을 세계적 통례라고 자가 변호의 재료로 삼아서는 안 되며, 이를 경계하고 교훈으로 삼아 한국이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아시아의 서열에서 선진적 위치를 확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50년대 중·후반 제삼 세계 민족주의에 주목했던 사상계의 지식인으로 신상초, 김성식, 양호민 등을 들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김준엽에 비하여 이들은 제삼 세계 민족주의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후진성의 관점에서 보다 비판적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신상초는 유럽이 밟았다고 간주한 근대사회로의 경로를 기준으로 아시아적 정체성, 봉건성, 후진성 등의 관점에서, 그리고 비동맹 노선에 대한 우려와 비판적 시선 속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동향에 접근했다. 그는 제삼 세계에서도 서구 시민혁명과 유사하게 시민계급이 주도하는 자유주의적인 근대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는 과거 식민지였던 국가의 봉건적 사회구조로 인해 자유주의가 아니면 파시즘이나 전체주의로 쉽게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민족주의가 공산화의 통로가 되는 현상에 대한 경계와 비판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제기되었다. 신상초는 이집트의 나세르가 제2의 장제스가 될 것을 경계하면서 서독과 일본, 터키 등의 예를 들고 나 쇼 나리쯤 즘의 원리를 관철하면서 민족의 이익이 공동이 번성해 나가는 데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가 오히려 강인하고 탄력성 있는 제도임을 내세웠다. 한국 사회에 대한 시선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우리는 20세기 후반기 한국에서 살고 있지만 사회의 발전 단계는 19세기 유럽 사회나 아메리카 사회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면서 산업혁명이 현재 진행 중이며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그에 따라 한국 사회 근대화의 목표로 정치적으로는 '국민국가'의 완성, 경제적으로는 상품경제의 확립, 사회적으로는 씨족제도의 일소와 소가족제도를 통한 봉건적 인간관계와 인간 의식의 해소 등을 들었다.



출처:한국 사회과학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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